주자평전 박스 세트 - 전2권 - 수징난 지음, 김태완 옮김/역사비평사 |
교조적 관념적 사상가가 아닌,
남송의 현실 세계에 살았던 인간으로서 주희를 그려내다
고려 때 들여와서 조선시대에 꽃을 피운 주자학은 정치, 사상, 문화에서 일상생활까지 지배한 학문이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높은 경지의 학술적 발전을 거친 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공리공담의 학문으로 변질되어버리고, 교조적이고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일정 정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해낸 중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특히 사회주의혁명을 거친 중국에서 급진 혁명가가 본 주희는 공가점(孔家店, 중국의 도덕 문화 정신 체계에 형성된 공자의 학설 또는 공자의 유교 사상을 선전하는 거점을 뜻하는 말로서 희화한 표현)의 부사장이고, 좌파 철학가가 본 주희는 유심주의의 파편을 흩뿌리는 도학 사기꾼이었다.(저자의 후기. (하)권 967쪽)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인식을 깨기 위해 ‘종합적인 주희의 전기’를 썼다. 교조적이고 관념적인 사상가로서 주희가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주희를 힘껏 그려냈다.
모든 사상이나 철학은 당대의 현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인 형식이다. 주희의 주자학 역시 남송이라는 사회 현실의 문제와 직면하여 형성되었다. 주자학이 학문 권력으로 되면서 낳은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주자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자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권력 집단의 기득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은 우리가 상투적으로 이해하듯이 교조적이고 비현실적인 공리공담의 공허한 형이상학, 관념론적 학문이 아니며, 주희 또한 교조주의자, 관념론자, 봉건적 전제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삶의 현실에서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깨닫고 대결한 삶을 산 현실에 살아 있던 사람이다.
요컨대, 학문 이론뿐만 아니라 자기 이상의 실현에서도 철저한 삶을 살았던 이론(인식)과 실천의 조화를 추구한 인물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널리 배우고, 깊이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석하고, 독실하게 실천했던, 살아 숨 쉬던 주희를 실제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았던 주희의 삶
: 행정개혁가로서 주희
중국어판으로 1082쪽, 한국어판으로 2400쪽(중국어판에 없는 260여 쪽의 부록 포함)에 이르는 분량이 말해주듯, 이 책은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이다. 주희의 탄생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학자로서의 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이 아주 상세히 펼쳐진다. 그의 위대한 학문이 여러 학자와의 논변을 거쳐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물론이고, 과거에 급제한 뒤 외직으로 보임되어 지방관으로서 펼친 행정, 그리고 평생 고종, 효종, 광종, 영종이라는 네 황제를 섬겼지만 조정에서 경연관으로 실제로 근무한 것은 고작 46일에 불과한 기간에 펼친 정치 이론이 생생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행정개혁가로서의 주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짧은 기간에 주희가 펼친 행정은 중국사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사상가로서 주희의 면모에 치중한 나머지 그가 남긴 행정적 업무 능력은 간과하고 있다.
주희의 과거시험 성적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그가 맡은 직책도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천주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부임하여 판적과 전세를 조사한 뒤 경계(經界, 토지 측량, 토지 경계 정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쉰(1179년)에 이르러 남강에 부임해서는 세금 감면과 부역 면제, 그리고 가뭄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진작시키는 진황 정책을 눈부시게 성공시킨다. 1190년 장주에 부임해서는 경계가 시행되지 않는 것이 지방행정의 전체 폐단이라고 생각하고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가 올린 주장(奏章)은 통렬하고 절절하다. “관에서 이미 불법을 저지르고 아전이 또 간사한 짓을 합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백성이 받는 피해가 더욱 큽니다. …… 만약 경계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러한 병폐의 근원을 혁파할 방법이 없습니다.”(하권 18장. 460~461쪽) 마침내 그의 의견은 절충된 형태로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만, 얼마 안 있어 그마저도 조정 신료의 저지와 방해로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논전의 일생 :
여러 학자들과 벌인 서신 논쟁에서 세 거인(주희, 여조겸, 육구연)의 역사적 회합까지
주희는 평생의 지기인 장식(張?), 여조겸(呂祖謙)뿐 아니라 진량(陳亮), 육구연(陸九淵)을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과 크고 작은 학술 논전을 거치면서 그의 이학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였다. 주희는 한당의 경학, 송대의 이학(理學)을 두로 통섭하여 송대(宋代)의 신유학을 구축한 사상가로서 떠받들리고 있는데, 저자 수징난은 무엇보다 주희의 이학이 ‘인본주의 인간학’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르면 주희는 낡은 천인합일의 문화 모형을 빌려 ‘인본(人本)’과 ‘이본(理本)’을 통일하였으며, 그의 체계에서 인본(人本)·심본(心本)·이본(理本)은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주희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주희가 펼친 논전을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주희는 도가와 불가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깊이 공부하여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이뤄냈다고 평가되는데, 저자는 주희가 젊은 시절 도가와 불교에 심취한 과정과 이를 각성하고 자아 반성을 하면서 도교와 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한 일에 대해 서술한다.(물론 이 같은 비판은 주희 자신이 불교와 도교를 심도 있게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저자 수징난은 주자학이 불교와 도교를 융회했다는 사실에만 천착하지 않고, 역으로 당시 사회에 범람하던 불교와 도교에 반대하여 나왔다고 본 것이다.
장식의 호상학(湖湘學), 여조겸의 절학(浙學)과 끊임없이 논전하며 청산하는 과정, 한천(寒泉)·아호(鵝湖)·삼구(三衢)에서 여조겸, 육구연과 만나 유교·불교에 대한 논변을 거치면서 이학 사상의 일치와 경학 사상의 대립을 확인하는 과정, 진량과 벌인 의리(義理)·왕패(王覇) 논변, 그리고 육구연과 벌인 태극(太極) 논전 등, 수많은 논쟁은 그의 사상이 결코 홀로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시편에 나타난 주희의 고뇌와 학문적 총결
날카로운 정치 비판이 담긴 차자와 봉사
저자 수징난은 한당 유학과 북송 유학을 뛰어넘는 주희의 새로운 경학 체계가 완성해 나가는 과정뿐 아니라, 주희가 남긴 수많은 시편을 통해 그의 고뇌와 학문적 진보를 발견한다. 우리는 보통 경학사에서 『대학』·『중용』·『논어』·『맹자』 네 경을 오경학(五經學) 외에 독립적인 사서학(四書學)의 체계로 확립한 주희의 학문적 성취에 주목한다. 특히 『사서집주(四書集注)』의 경학 체계는 당시 전통적인 경(經) 해석 체계를 벗어난 독창적인 해석학이었기 때문에, 주희의 경부(經部) 저술이나 어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 책은 주희의 학문 발전 과정에 대한 서술은 물론이고,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시편을 통해 주희의 생각의 흐름을 잡아낸다. 주희를 비롯하여 그와 관계한 문인이나 제자들의 시편도 감상할 수 있다. 은유와 비유로 지어진 시는 자칫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저자는 이 시들에 담긴 뜻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젊은 시절 도교와 불교에 드나들면서 선(禪)의 기운이 충만한 시를 읊고,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정리한 시를 지으며, 육구연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심학을 비판하는 시를 짓고, 제자들과 함께 무이구곡을 유람하며 전원시의 간결하고 고상하며 생기 넘치는 「무이도가(武夷櫂歌)」(이 시는 당대의 많은 이들이 따라 지을 정도로 유명했다)를 원문과 함께 보여준다.
정치개혁가로서 주희의 모습은 그가 올린 차자(箚子)와 봉사(封事)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특히 남송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비판한 「무신봉사(戊申封事)」뿐 아니라, 남강군의 지군으로서 효종에게 차자를 올려 읊어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긴박감이 감돈다. 주희는 이때의 장면을 위염지(魏?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6일에 등대하여서 처음에 치지격물(致知格物)의 도를 논한 첫째 차자를 읽었더니 임금의 얼굴빛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메아리처럼 호응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복수의 의리를 논한 둘째 차자를 읽고, 언로가 꽉 막히고 영행(?幸, 아첨하면서 군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 들끓는 문제를 논한 셋째 차자를 읽었더니 다시는 임금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문집』 권24 「여위원리」 서1)
수많은 자료의 발굴을 통해 엄밀하게 고증해낸 당시의 정치 사회 모습, 그리고 셀 수 없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 속에서 드러난 열띤 학문 논쟁이 이 책에 생생하게 복원된다.
남송의 현실 세계에 살았던 인간으로서 주희를 그려내다
고려 때 들여와서 조선시대에 꽃을 피운 주자학은 정치, 사상, 문화에서 일상생활까지 지배한 학문이었다. 그런데 이 학문은 높은 경지의 학술적 발전을 거친 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점차 공리공담의 학문으로 변질되어버리고, 교조적이고 관념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일정 정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주자학의 창시자, 주희라는 위대한 사상가를 배출해낸 중국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특히 사회주의혁명을 거친 중국에서 급진 혁명가가 본 주희는 공가점(孔家店, 중국의 도덕 문화 정신 체계에 형성된 공자의 학설 또는 공자의 유교 사상을 선전하는 거점을 뜻하는 말로서 희화한 표현)의 부사장이고, 좌파 철학가가 본 주희는 유심주의의 파편을 흩뿌리는 도학 사기꾼이었다.(저자의 후기. (하)권 967쪽)
저자는 바로 이 같은 인식을 깨기 위해 ‘종합적인 주희의 전기’를 썼다. 교조적이고 관념적인 사상가로서 주희가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주희를 힘껏 그려냈다.
모든 사상이나 철학은 당대의 현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인 형식이다. 주희의 주자학 역시 남송이라는 사회 현실의 문제와 직면하여 형성되었다. 주자학이 학문 권력으로 되면서 낳은 동아시아 전근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주자학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주자학을 통해 권력을 획득한 권력 집단의 기득권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은 우리가 상투적으로 이해하듯이 교조적이고 비현실적인 공리공담의 공허한 형이상학, 관념론적 학문이 아니며, 주희 또한 교조주의자, 관념론자, 봉건적 전제군주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그가 아니라 삶의 현실에서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깨닫고 대결한 삶을 산 현실에 살아 있던 사람이다.
요컨대, 학문 이론뿐만 아니라 자기 이상의 실현에서도 철저한 삶을 살았던 이론(인식)과 실천의 조화를 추구한 인물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널리 배우고, 깊이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석하고, 독실하게 실천했던, 살아 숨 쉬던 주희를 실제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혹은 주목하지 않았던 주희의 삶
: 행정개혁가로서 주희
중국어판으로 1082쪽, 한국어판으로 2400쪽(중국어판에 없는 260여 쪽의 부록 포함)에 이르는 분량이 말해주듯, 이 책은 어마어마한 두께의 책이다. 주희의 탄생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학자로서의 삶,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인생이 아주 상세히 펼쳐진다. 그의 위대한 학문이 여러 학자와의 논변을 거쳐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물론이고, 과거에 급제한 뒤 외직으로 보임되어 지방관으로서 펼친 행정, 그리고 평생 고종, 효종, 광종, 영종이라는 네 황제를 섬겼지만 조정에서 경연관으로 실제로 근무한 것은 고작 46일에 불과한 기간에 펼친 정치 이론이 생생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 책에서는 특히 우리가 그동안 잘 몰랐던 행정개혁가로서의 주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사실 짧은 기간에 주희가 펼친 행정은 중국사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사상가로서 주희의 면모에 치중한 나머지 그가 남긴 행정적 업무 능력은 간과하고 있다.
주희의 과거시험 성적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그가 맡은 직책도 고위직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24세 때 천주 동안현의 주부(主簿)로 부임하여 판적과 전세를 조사한 뒤 경계(經界, 토지 측량, 토지 경계 정비)를 시행하고자 했지만,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나이 쉰(1179년)에 이르러 남강에 부임해서는 세금 감면과 부역 면제, 그리고 가뭄으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의 삶을 진작시키는 진황 정책을 눈부시게 성공시킨다. 1190년 장주에 부임해서는 경계가 시행되지 않는 것이 지방행정의 전체 폐단이라고 생각하고 조정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그가 올린 주장(奏章)은 통렬하고 절절하다. “관에서 이미 불법을 저지르고 아전이 또 간사한 짓을 합니다. 이 때문에 가난하고 약한 백성이 받는 피해가 더욱 큽니다. …… 만약 경계를 시행하지 않는다면 결코 이러한 병폐의 근원을 혁파할 방법이 없습니다.”(하권 18장. 460~461쪽) 마침내 그의 의견은 절충된 형태로 조정에 받아들여지지만, 얼마 안 있어 그마저도 조정 신료의 저지와 방해로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논전의 일생 :
여러 학자들과 벌인 서신 논쟁에서 세 거인(주희, 여조겸, 육구연)의 역사적 회합까지
주희는 평생의 지기인 장식(張?), 여조겸(呂祖謙)뿐 아니라 진량(陳亮), 육구연(陸九淵)을 비롯한 당대의 학자들과 크고 작은 학술 논전을 거치면서 그의 이학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였다. 주희는 한당의 경학, 송대의 이학(理學)을 두로 통섭하여 송대(宋代)의 신유학을 구축한 사상가로서 떠받들리고 있는데, 저자 수징난은 무엇보다 주희의 이학이 ‘인본주의 인간학’이라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에 따르면 주희는 낡은 천인합일의 문화 모형을 빌려 ‘인본(人本)’과 ‘이본(理本)’을 통일하였으며, 그의 체계에서 인본(人本)·심본(心本)·이본(理本)은 같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주희에 대한 저자의 평가를 염두에 두고 주희가 펼친 논전을 살펴보면 그의 사상이 좀 더 새롭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주희는 도가와 불가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깊이 공부하여 ‘삼교합일(三敎合一)’을 이뤄냈다고 평가되는데, 저자는 주희가 젊은 시절 도가와 불교에 심취한 과정과 이를 각성하고 자아 반성을 하면서 도교와 불교를 날카롭게 비판한 일에 대해 서술한다.(물론 이 같은 비판은 주희 자신이 불교와 도교를 심도 있게 공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컨대 저자 수징난은 주자학이 불교와 도교를 융회했다는 사실에만 천착하지 않고, 역으로 당시 사회에 범람하던 불교와 도교에 반대하여 나왔다고 본 것이다.
장식의 호상학(湖湘學), 여조겸의 절학(浙學)과 끊임없이 논전하며 청산하는 과정, 한천(寒泉)·아호(鵝湖)·삼구(三衢)에서 여조겸, 육구연과 만나 유교·불교에 대한 논변을 거치면서 이학 사상의 일치와 경학 사상의 대립을 확인하는 과정, 진량과 벌인 의리(義理)·왕패(王覇) 논변, 그리고 육구연과 벌인 태극(太極) 논전 등, 수많은 논쟁은 그의 사상이 결코 홀로 완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시편에 나타난 주희의 고뇌와 학문적 총결
날카로운 정치 비판이 담긴 차자와 봉사
저자 수징난은 한당 유학과 북송 유학을 뛰어넘는 주희의 새로운 경학 체계가 완성해 나가는 과정뿐 아니라, 주희가 남긴 수많은 시편을 통해 그의 고뇌와 학문적 진보를 발견한다. 우리는 보통 경학사에서 『대학』·『중용』·『논어』·『맹자』 네 경을 오경학(五經學) 외에 독립적인 사서학(四書學)의 체계로 확립한 주희의 학문적 성취에 주목한다. 특히 『사서집주(四書集注)』의 경학 체계는 당시 전통적인 경(經) 해석 체계를 벗어난 독창적인 해석학이었기 때문에, 주희의 경부(經部) 저술이나 어류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 책은 주희의 학문 발전 과정에 대한 서술은 물론이고, 그동안 소개되지 않았던 다양한 시편을 통해 주희의 생각의 흐름을 잡아낸다. 주희를 비롯하여 그와 관계한 문인이나 제자들의 시편도 감상할 수 있다. 은유와 비유로 지어진 시는 자칫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데, 저자는 이 시들에 담긴 뜻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젊은 시절 도교와 불교에 드나들면서 선(禪)의 기운이 충만한 시를 읊고, 자신의 학문적 성취를 정리한 시를 지으며, 육구연과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심학을 비판하는 시를 짓고, 제자들과 함께 무이구곡을 유람하며 전원시의 간결하고 고상하며 생기 넘치는 「무이도가(武夷櫂歌)」(이 시는 당대의 많은 이들이 따라 지을 정도로 유명했다)를 원문과 함께 보여준다.
정치개혁가로서 주희의 모습은 그가 올린 차자(箚子)와 봉사(封事) 등을 통해 볼 수 있다. 특히 남송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지적이고 냉정하게 비판한 「무신봉사(戊申封事)」뿐 아니라, 남강군의 지군으로서 효종에게 차자를 올려 읊어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긴박감이 감돈다. 주희는 이때의 장면을 위염지(魏?之)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6일에 등대하여서 처음에 치지격물(致知格物)의 도를 논한 첫째 차자를 읽었더니 임금의 얼굴빛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메아리처럼 호응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복수의 의리를 논한 둘째 차자를 읽고, 언로가 꽉 막히고 영행(?幸, 아첨하면서 군주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 들끓는 문제를 논한 셋째 차자를 읽었더니 다시는 임금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습니다.”(『문집』 권24 「여위원리」 서1)
수많은 자료의 발굴을 통해 엄밀하게 고증해낸 당시의 정치 사회 모습, 그리고 셀 수 없이 주고받은 많은 편지 속에서 드러난 열띤 학문 논쟁이 이 책에 생생하게 복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