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2일 목요일

정의를 부탁해 - 손석희, 장강명이 탐독하는 기자 권석천의 칼럼집

정의를 부탁해 - 10점
권석천 지음/동아시아
손석희, 장강명이 탐독하는 기자 권석천의 칼럼집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정의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헌사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우면서도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거리엔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참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게 가로 14.3cm, 세로 25.2cm의 지면을 통해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건 특혜이고 행운입니다. 또한, 제가 키보드를 두드릴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의 현장, 조사실, 법정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신기루 같은 정의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분투하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프롤로그 중)

『정의를 부탁해』는 25년차 베테랑 기자 권석천이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고 느낀, 생생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는 목청 높여 무언가를 주장하기보다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독자들을 불러 세운다. 마치 ‘시간 있으면 함께 얘기 나눠보실래요?’ 하고 묻듯이. 주고받는 물음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가 가리키는 방향과 다른 관점,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우리가 믿고 있는 게 최선일까’ 고민하게 된다.
권석천의 눈은 한국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세대와 이념, 그리고 지역의 벽(壁) 너머에 있는 진실을 직시하려 애쓴다. 세월호와 메르스의 한복판에서 권력과 검찰, 법원의 심장부까지, 참혹한 살인부터 절박한 취업까지 현장을 뛰어다니며 그 속사정을 파고든다. 그리하여, 그 공간과 시간들 사이에 정의의 자리는 비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는 묻는다. ’자, 우린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권석천은 책에서 우리가 서 있는 자리(1부)를 돌아보고, 한국 사회의 작동 원리(2부)를 확인한 다음 한국 정치, 검찰, 사법, 범죄, 언론의 현실에서 정의를 묻고(3부), 앞으로 우리가 가야할 길(4부)을 모색한다. 주제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 주제들을 하나로 묶는 건 ‘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과 새로운 지향점에 대한 고민이다.
아울러 80여 개의 칼럼들을 통해 스타일의 실험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소설체, 반어체, 고어체, 대화체, 편지체, Q&A 등 다양한 문체들이 풍성하게 펼쳐진다. 소설 『페스트』와 『레미제라블』을 텍스트 삼아 박근혜 정부의 메르스 대응과 이명박 정부의 법질서 캠페인을 비판하는가 하면, 드라마 <펀치> <추적자>와 영화 <부당거래> <소수의견>을 통해 한국 검찰과 사법의 뒷골목을 폭로하고 그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2015년을 살고 있는 계나(소설 『한국이 싫어서』 주인공)가 1930년대의 안옥윤(영화 <암살> 주인공)에게 띄우는 편지글에서 시대를 넘어 여전히 암약하는 불의를 다루고, 버스커버스커의 <여수 밤바다> 가사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청년들의 슬픔과 아픔을 건져내기도 한다.

’2015년의 우리가 계속 싸우고 있다고 알려주는 건 뭘까. 우리 모습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다른 톰슨가젤이 잡아먹힐 때 사자에게 맞짱은 못 뜨더라도 함께 비명이라도 질러주는 것. 그런 것일까. 내가 안 죽였다고, 나는 살아남았다고, 그러니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착한 바보로 살기 싫어서’ 중)

손석희와 장강명, 그리고 저스티스 리그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받는 언론인 손석희는 이 책의 가장 큰 힘을 ‘공감’에서 찾는다. 손석희는 이미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통해 권석천과의 합작품들을 선보인 바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이미 거의 다 읽어보았다. 나는 그의 팬이다. 아니, 그는 내가 팬인 거의 유일한 글쟁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의 글이 웅장해서도 아니요, 당대의 제일가는 명문이어서도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감할 수 있어서다. 나는 이 책을 지금 처음 손에 쥔 사람들에게 그냥 서문만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서문에서 어떤 뭉클함을 함께한 독자라면 그 다음 본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가 권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해도 글은 그 본질을 추구하며 권석천은 어떤 허장성세도 없이 그 본질로 들어간 글쟁이다.’(손석희 추천사 중)

『한국이 싫어서』의 작가 장강명 역시 ’한국 사회와 정치를 똑바로, 깊이 보려는 분들께 그의 글을 권한다’고 했다.

’권 선배의 글을 좋아한다. 아니 흠모한다. 펜 든 사람들이 한쪽 편을 들며 환호를 얻거나 공허한 훈수로 펜의 힘을 스스로 죽일 때, 그는 그러지 않는다. 상상의 적을 때려눕히고 ‘우리 편’에게 값싼 카타르시스를 주는 대신, 그는 날카롭게 들여다보고 때로는 거울을 들이민다. 지금 한국 사회와 정치를 똑바로, 깊이 보려는 분들께 그의 글을 강력히 권한다.’ (장강명 추천사)

정의의 빈 자리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의를 부탁해』의 저자 권석천은 집요하게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이야기한다. 혼자선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그러니 당신과 내가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를 위해 모이자고, 고민하자고. 손석희와 장강명이 주목한 그에게 이제 여러분이 다가설 차례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

우리는 목격하곤 한다. 정의의 길은 지난하고, 불의는 대개 승리하며, 진실은 종종 왜곡된다는 사실을. 사람이 변하지 않듯 현실도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좌절하고, 시류에 편승해 적응해나가면 그만일까? 적자생존, 승자독식만이 변함없는 진리일까?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예컨대 슈퍼 히어로나 메시아가 나타나 세상을 구하길 기다리는 게 현명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에필로그 중)

세상 어느 누구도 늘 정의를 위해 싸우거나 매 순간 정의를 생각하며 살진 않는다.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 가족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개개인이 정의를 말하고, 정의롭게 행동할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다. 하지만 또한 모두 알고 있다. 모두가 정의를 말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불의를 참고 넘긴다면 세상은 ‘힘 있는 자, 돈 많은 자의 천국’ ‘힘없는 자, 가난한 자의 지옥’이 될 것이다. 그런 세상에선 누구나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없고, 누구도 행복을 추구할 수 없다.
내가 힘들 땐 당신이, 당신이 힘들 땐 내가 나서서 정의를 말해야 한다. ’이러면 안 됩니다.’ ’정말 이래도 됩니까?’라고. 또 내가 잘못할 땐 당신이, 당신이 잘못할 땐 내가 물어야 한다. ’정말 그렇습니까?’ ’꼭 이래야 합니까?’라고. 정의는 당신에게 혹은 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당신과 나 사이에 있다고 권석천은 말한다.
사고를 치고 달아나려는 악인 앞에서 ’나 저기 아트박스 사장인데’(영화 <베테랑> 대사 중)라고 말할 정도의 작은 용기만 있으면 된다. 그러면 누군가 또 앞으로 나와 ’나 저기 슈퍼마켓 사장인데’라고 막아설 것이다. 어쩌면 작은 선의, 작은 정의감들이 모여 이 사회를 지탱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정의에 대한 열망을 지닌 베테랑 시민들이 보다 바른 세상으로 나아가려고 함께 노력할 때 변화는 시작될 것이라고 권석천은 말하고 있다.

’우리에겐 ‘<베테랑>에 영감을 준 진짜 베테랑들’(류승완 감독 인터뷰)도 있다. 류 감독 말처럼 ‘침몰하는 배에서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힘썼던 선생님’도 있었고, 메르스에 맞서 환자들 생명을 지켰던 간호사도 있다. 이제 분명한 사실은 을들이 싸움의 기술을 터득하기 시작했고, 그들 속에도 베테랑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패배주의에 빠져 있을 수 없다는 열망들이 조금씩 결집돼 가고 있다는 것이다.’(‘베테랑이 이긴 네 가지 비결’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