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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3일 일요일

쌤통의 심리학 -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은밀한 본성에 관하여

쌤통의 심리학 - 10점
리처드 H. 스미스 지음, 이영아 옮김/현암사

유명 정치인의 추문, 잘나가던 연예인의 몰락, 라이벌의 실수……
“고것 참 쌤통이다!”
심리학적, 진화론적으로 풀어낸 인간 본성의 어두운 이면

왜 타인의 불행은 곱씹을수록 통쾌한가?
선한 사람들의 악마적 본성, ‘샤덴프로이데’를 파헤친 최초의 책!


출근하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오늘도 포털 메인에는 기삿거리가 가득하다. 살이 쪄서 후덕한 모습으로 나타난 연예인, 청렴결백을 주장하더니 뇌물 수수 의혹이 제기된 정치인, 연봉 올리기에 실패한 운동선수 이야기가 핫이슈다. 안타까운(?) 그들의 사연에 가볍게 탄식해본다.
“아휴, 어쩌다 이렇게 됐대? 쯧쯧. 잘 좀 처신하지 못하고.”
하지만 이 순간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감정을 리트머스 시험지로 테스트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즐거움’에 한없이 가깝지 않을까?
비호감 연예인의 몰락, 라이벌 팀의 실수, 기세등등하던 회사 동기의 추락, 얄미운 친구의 사사로운 불행…….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은밀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사람 잘못 봤어. 난 그런 사람 아냐”라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심리학자 리처드 H. 스미스는 단언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감정을 타고나며 평생토록 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무덤까지 가져간다고.
대체 우리는 왜 타인의 불행을 즐기는 것일까? 이렇게 음습한 감정으로 인해 얻는 이득이라도 있는 걸까? 이 감정을 자주 느끼는 사람과 거의 느끼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쌤통의 심리학』은 이런 은밀한 감정의 원인은 무엇이며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이 감정이 대중적으로 용인되어 널리 퍼질 때 역사적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풍부한 사례를 들며 차근차근 따진다. 꽤나 어두운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글은 시종일관 발랄하고 유머러스하다. 마음의 ‘가드’를 내리고 편안하게 읽다 보면 어느새 “그래, 사실은 나도 그런 감정 느껴봤어” 하고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쌤통 심리의 원동력은 ‘실질적 이득’
인간은 진화를 통해 이 감정을 마음에 새겼다

쉽게 인정하고 싶지는 않겠지만, 우리에게는 타인의 불행을 즐거워하는 감정이 있다. 실력 없이 오만하기만 한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무대에서 망신을 당할 때, 기고만장한 정치인의 악행이 까발려졌을 때 누구든 즐거워하지 않겠는가. 타인의 고통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뜻하는 독일어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즉 ‘쌤통 심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
질투 연구의 대가인 저자 리처드 H. 스미스는 쌤통 심리가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 말한다. 실제로 남들의 불행이 우리에게 ‘실질적 이득’을 가져다주기에 이를 ‘기뻐하는’ 감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얻기 위해 끊임없이 남과 비교한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 실수를 한다면? 그의 지위가 ‘낮아진 만큼’ 우리의 지위는 ‘높아지는’ 반사 이익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쌤통 심리의 근원이다.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평가하는 경향, 그리고 이에 따른 감정적 변화는 우리 삶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타인의 불행은 우월감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물론 이런 감정을 ‘대놓고’ 드러내기는 쉽지 않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감춰야만 할 듯한 쌤통 심리도 경우에 따라서는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쌤통 심리가 펼쳐지는 공공의 장, 바로 스포츠 경기장이다.

한일전 역전승이 짜릿한 과학적 이유
자업자득의 불행은 언제나 통쾌하다!

2015년 11월에 열린 월드베이스볼 한일전 9회 초, 0 대 3에서 갑작스레 4 대 3으로 역전하며 승리를 쟁취했을 때 많은 국민이 환호성을 질렀다. 인터넷에는 속 시원하다는 반응과 함께 일본 선수들의 멍한 표정이 캡처되어 나돌았고, 사람들은 앞다퉈 “사이다 한 사발 들이킨 기분”, “그간의 망언을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등 통쾌하다는 의견을 써 내려갔다. 물론 한일전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대항전에서 우리는 쌤통 심리를 강하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사실 이 부분에 이르면 더 이상 “나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 하는 그런 사람 아니야”라는 저항이 무색해진다.)
집단 간의 역학 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쟁적이며, 개인 간 경쟁보다 더 치열하다. 게다가 집단에 묻혀 있으면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혼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집단 속에서 쌤통 심리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외집단을 깎아내린다. 심지어 외집단을 모욕하며 “다 자업자득이지!”라고 근엄하게 결론짓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자업자득의 불행’처럼 통쾌한 것도 없다!
저자는 자업자득으로 당하는 불행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런 불행을 통쾌하게 여기는 감정은 위선에 대한 ‘정의 실현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정의감은 분명 추천받아 마땅한 ‘선한’ 감정이지만 그 이면에 ‘악한’ 복수심이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런 짓을 했으니 당해도 싸”라고 정의를 내세우며 ‘정당한’ 통쾌감을 한껏 만끽하는 것이다. 물론 그 ‘정의’가 진정한 정의인지는 아무도 모르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정의가 맞는지조차 중요하지 않다!

쌤통 심리의 감정적 출발점은 질투심
직시하기 괴로운 질투가 ‘분노’로 치환되며 퍼진 비극, 홀로코스트

저자는 쌤통 심리라는 감정에 쉽게 ‘악’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행위를 경계한다. 인간은 기쁨도 불쾌함도, 행복도 분노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며 쌤통 심리는 인간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 감정을 직시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감정으로 치환되어 위험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쌤통 심리의 밑바닥에는 질투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질투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종 질투심은 다른 감정의 가면을 쓴다. 가장 손쉽게 쓰는 가면은 혐오와 증오, 그리고 분노다.
우리는 상대가 자신보다 뛰어나서 질투 난다는 사실을 직시하기보다, 그를 싫어하는 합리적인 ‘변명거리’를 만드는 데 애쓴다. “걔가 뭐가 잘났어? 부모덕에 호강하는 거지.” “얼굴도 빤질하게 생긴 게 하는 짓도 빤질빤질이야. 얼굴값을 한다니까!” “잘나가면 뭐해, 성격이 그 모양인데. 그렇게 수전노처럼 굴면서 살고 싶을까.”
이렇게 혐오의 가면을 쓴 질투는 조금씩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정의롭고 응당한 증오로 변해간다. “부모덕에 잘살면서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다니. 걘 좀 당해봐야 해.” “얼굴만 믿고 쉽게 인생 살려고 하네. 무임승차에도 정도가 있지. 염치없는 놈.” “돈 앞에서 친구고 뭐고 없다 이거야? 자기 잇속만 챙기는 탐욕스러운 자식!”
이제 모든 판이 짜였다. 이 ‘나쁜 놈’은 ‘욕먹을 만’하므로 혐오감과 증오는 정당하다 못해 정의롭기까지 하다. 그리고 악한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고 올바른 일이다. 만약 이 악마가 불행을 겪는다면? 인류의 경사에 버금가는 즐거운 일이 된다!
저자는 이러한 질투의 치환 과정이 집단적으로 일어난 예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든다. 유대인이 독일 경제.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으로 떠오르자 히틀러는 그들을 두려워하고 질투했다. 그의 질투는 혐오감과 분노를 거쳐 ‘합당한 이유’가 있는 ‘정의로운 증오’로 탈바꿈했으며, 질투심을 공유하던 독일인들의 마음에서 싹을 틔웠다. 그 후의 비극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쌤통 심리와 공감 사이의 외줄 타기
‘인간 본성의 선한 천사들’의 손을 들어주는 법

쌤통 심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므로 없앨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 감정이 생겨날 가능성을 줄이는 것뿐이다. 저자는 쌤통 심리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해법으로 ‘기질을 짐작하지 말고 상황을 파악하라’고 조언한다.
누군가의 행동을 보고 그 원인을 그 사람의 성격으로 돌리면, 그의 불행 또한 성격 탓으로 여겨져 쌤통 심리에 빠지기에 십상이다. “길거리에서 남에게 소리를 지르다니, 예의 없는 작자네. 자기도 똑같이 당해봐야 깨닫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하면 결론이 180도 바뀔 수 있다. “방금 소매치기당할 뻔하다가 도둑을 잡았구나. 당연히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안타깝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타인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감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마음속의 저울 한편에는 이와 대등한 공감 능력과 연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기심과 이타심, 쌤통 심리와 연민은 평생 우리 마음속 양팔 저울에서 출렁이며 그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 어느 쪽에 무게를 실을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2015년 10월 27일 화요일

눕기의 기술- 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

눕기의 기술 - 10점
베른트 브루너 지음, 유영미 옮김/현암사

미켈란젤로가 눕지 않았다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없었다!
가장 적은 에너지로 큰 효율을 내는 ‘수평적 삶’을 찬양하라!

역사, 철학, 문학, 예술, 과학의 시선으로 살핀 인간의 ‘가로 본능’
미켈란젤로, 프루스트, 니체, 페터 슬로터다이크… 유명인의 ‘눕기 예찬’
수평 자세를 잊은 당신을 위한 능동적 눕기 지침서


퇴근하고 집에 가면 소파에 반쯤 누워 무기력한 자세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며 여유를 만끽한다. 주말에는 내내 누워서 뒹굴 거리며 스마트 폰을 보고 낄낄댄다. 가끔은 공공장소에서도 비스듬히 앉아 한없이 수평에 가까운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모든 행동에 습관적으로 변명한다.
“너무 피곤해서 그래. 요즘 많이 바빴거든.” “어제 잠을 잘 못 자서…….” “일주일의 피로를 풀려면 주말에는 누워 있을 수밖에 없어.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고.”
대체 왜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덧붙이는 걸까? 아무 일 없이 눕는 것은 게으름의 상징이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일까? “나는 눕고 싶어서 누웠을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걸까? 『눕기의 기술』은 바로 이런 물음에서 탄생했다. 저자는 인간에게 수평 자세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인문학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르며 지적인 탐색을 거듭한다. 어떤 방향으로 누워야 할지, 고대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잠자리를 마련했는지, 어떻게 누워야 잘 누웠다고 소문날지… 인류 탄생 이후부터 이어진 다양한 눕기에 대한 유쾌한 읽을거리가 가득한 책이다.

앉고, 걷고, 뛰는 무한 경쟁 사회에 브레이크를 거는 ‘수평적 삶’
비생산적이고 쓸모없기에 더욱 소중한 ‘눕기’를 옹호하다

우리는 인생의 3분의 1을 누워서 보낸다. 게다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종종 누운 자세로 행해진다. “작가가 완수해야 하는, 그리고 대부분 누워서 완수하는 인생의 세 가지 위대한 행위는 탄생, 성교, 죽음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인간을 무한 경쟁으로 내모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눕기는 그저 게으름의 상징일 뿐이다. 현대인은 출근 전과 퇴근 후에도 ‘자기계발’로 몸과 마음을 혹사한다. 주말에는 미뤄뒀던 문화생활과 취미 활동 때문에 아침부터 분주하다. ‘죽어라’ 공부하고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노는 모습이 마치 모범적인 삶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SNS에 공개하며 자신이 얼마나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전시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 그 누구도 눕지 않고는, 빈둥대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림에 여백이 필요하듯 우리 삶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심지어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종종 누워서 휴식을 취할 때 떠오르지 않던가. 신체는 반드시 ‘쉼’을 필요로 한다. 쉬지 않는 인간, 눕지 않는 인간은 결국 죽음에 다다를 뿐이다. 우리는 조금만 짬이 나면 편히 누워 빈둥대고 싶어진다. 이는 육체가 내리는 ‘휴식 명령’이다. 그러나 다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며 안 그런 척 연기한다. 하릴없이 누워 뒹굴다가도 누군가 전화해 뭐하냐고 물으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린다. “그냥 누워 있죠, 뭐”라는 답은 보기에도 들지 못한다. 『눕기의 기술』의 저자 베른트 브루너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경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눕기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찰한다.

아무도 몰랐던 눕기의 역사, 과학, 문학, 철학
머리맡에 두고 짬짬이 읽는 수평 자세의 은밀한 사생활

눕기를 관찰하는 저자의 시각은 다양하다. 7만 7,000년 전의 침상, 수면에 혁명을 일으킨 코일스프링 매트리스의 발명과 전파,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이 누워서 음식을 먹기 위해 특별히 고안해낸 소파와 그 현대적인 변용(마이애미에는 누워서 식사하는 레스토랑이 있다!), 침실의 사회적 변천사(고위층의 접견실이었던 고대부터 조금씩 숨기기 시작한 중세,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은 근대,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이 된 현대) 등 역사적인 주제가 책을 관통한다.
역사가 이 책의 근간을 이루는 씨실이라면 과학과 문학, 철학은 이 책에 무늬를 더하는 날실이다. 눕기란 무엇인가? 어떻게 누워야 가장 편안한가? 우리는 어떻게 자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자세를 바꿀 수 있는가? 저자는 황당하기까지 한 질문에 과학적 근거를 들어 답한다. ‘수평 자세=눕기’라는 정의는 무중력 공간에서 그 힘을 잃는다. 또한 노동 생리학자 군터 레만이 수조에서 실험한 바에 따르면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엉덩이와 무릎의 각도는 133~134도이다. 마지막으로 ‘자세를 바꿀 때임을 알려주는 신비로운 힘’이 신체의 특정 부분에 가해지는 압력, 즉 중력과 자신의 몸무게라는, 아주 당연하여 대체 왜 이걸 과학적으로 설명하는지 모르겠는 부분에 이르면 ‘예능을 다큐로 만드는 듯한’ 저자의 ‘진지 모드’에 뻘쭘해질 정도다. 중간중간 저자의 ‘진지 모드’를 돕는 과학적인, 그래서 더 유머러스한 삽화는 잠자리의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독서를 도울 것이다.

프로이트, 프루스트, 니체, 지젝… 눕기를 철학한 선지자들의 주옥같은 문구
수평 자세를 사랑하는 평화주의자를 위한 건설적 자기합리화!

이 책은 미국의 희극배우인 그루초 막스의 말로 포문을 연다. “누워서 할 수 없는 일은 가치 없는 일이다.” 이후 본문에는 무수히 많은 철학자와 문학가, 유명인들의 ‘눕기’ 옹호문과 기행이 줄줄이 나온다. 침대에 누워 작품을 쓴 것으로 유명한 마르셀 프루스트는 침대에 눕는 감각을 ‘나의 뺨으로 부드럽게 베개의 편안한 뺨을 눌렀다. 그 뺨은 어린 시절 우리의 뺨처럼 포동포동하고 상쾌했다’라고 표현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는 눕기용 의자인 카우치가 꼭 필요해서, 그가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할 때 카우치도 챙겨 갔다고 한다. 니체는 “잠자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기 위해 온종일 깨어 있어야 하니 말이다”라는 말을 남겼고, 독일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침대에 머물러 있으라. 눈이 떠졌을 때 해가 이미 중천에 있다고 곧바로 비타 악티바(vita activa, 행동하는 삶)로 돌입할 필요는 없다”라는 말로 게으름뱅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학계의 록 스타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도 수평 자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벗’으로 꼽힐 만하다. 그는 우리 삶의 수직/수평 비율이 어긋났다고 여기며, 스탈린 포스터 아래 침대에 누운 사진, 발가벗은 채 침대에 누워 철학하는 사진 등을 공개하며 수평 자세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여기까지 오면 수평 자세에 대한 묘한 자부심까지 생긴다. 눕는 자세 하나로 대자연의 진리(중력)에 순응하고 무한 경쟁 사회에 반하여 무위와 평화를 실천하고 있다는 자부심 말이다. 너무 멀리 나갔다고? 절대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눕기로 세상에 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독일은 물론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철학서 『피로사회』에서 재독철학자 한병철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잠이 육체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신은 창조를 마친 뒤 일곱째 날을 신성한 날로 선포했다. 그러니까 신성한 것은 목적 지향적 행위의 날이 아니라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일단 자리에 누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