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의 국어 운동 방해와 박해가 심했던 일제시대에도 국어운동은 활발히 이어졌습니다.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은 순한글 쓰기와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한글맞춤법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들의 한글 사용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창간일이 오늘날 ‘신문의 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시경(1876-1914)선생은 ‘한글'이란 이름을 ‘언문, 암클, 반절'이란 이름으로 천대받던 훈민정음의 권위를 되찾게 하였습니다.
또한 선생은 분석적인 방법으로 현대적인 국어학을 개척하고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여 국어 운동의 기초를 닦아, 한글을 새롭게 부흥시킨 한글의 중간 시조입니다.
조선어 연구회에서는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정하고 그 이름을 ‘가갸날'이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음력 9월 상순으로 되어있음을 알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습니다.
또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3년, 한글 반포 487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에서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습니다. 이로써 한글창제 이후 근 오백년 동안 제대로 된 언어규범이 없어 혼란스럽던 한글체제를 잡아줌으로써, 합리적인 언어 생활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1936년 <표준어 사정>, 1940년 <외래어 표기법> 제정, 1942년 <조선말 큰사전> 출판에 착수했습니다. 1932년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이 창간되고 1934년에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인 <정음>창간, 1931년-1934년에는 민간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치하의 대표적인 국어운동이었습니다.
1938년 4월 일제의 파멸적 교육령이 시행되면서 일제는 각급 학교의 조선어과 폐지에 이어 조선어 금지,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습니다. 특히 1942년에는 치안 유지법으로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자 29명을 구속하고 고문으로 사건을 날조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국어학자 한징, 이윤재가 옥사했으며, <조선말 큰사전> 간행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항일 문학 구한말 의병장들의 항일 한시부터 맥을 이어온 저항문학은 일제치하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졌습니다.
3·1운동 민족대표자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신경향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심훈의 <그날이 오면>, 1940년을 고비로 우리말과 글이 금지된 상황에서 우리말로 시를 써 끝까지 저항한 이육사, 윤동주님의 항일 문학에 흐르고 있는 것은 뜨거운 민족애와 고결한 애국정신이었습니다.